Ⅰ. 시작하는 말
한국찬송가공회를 향하여 말하던 오랜 세월의 시간들...
이제 개선을 말하지 않고 결론을 말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금년(2006년) 내에 『21세기찬송가』를 발간하여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
시간의 역행과 행위의 역행과 문화의 역행임을 찬송가공회는 알아야 한다.
이제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몰라도 그럴 가능성이 아주 적은 상황이어서 그렇다.
초보운전과 무면허운전으로 한국교회를 우롱하던 일단의 사람들,
이제는 역주행으로 찬송가문화의 현주소를 과거로 회귀시키려 하고 있다.
가사와 곡의 상호관계에 대한 기본상식이 결여되어 있어 안타깝게 하더니,
곡 구성의 기본인 박자의 흐름을 왜곡시켜 찬송가문화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
박자의 흐름은 형식의 관점에서 곡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이...
한국찬송가공회의 찬송가 운전능력은 초보운전, 무면허운전, 역주행의 모습을 보인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는 제작 당시 초보운전으로 인식되었고,
나왔다가 사라진 『신작증보판찬송가』는 무면허운전에서 비롯된 산물이고,
두 번 나타난 『21세기찬송가』의 시제품은 역주행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찬송가공회의 찬송가 운전능력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모습들이다.
한국찬송가공회는 세 가지 관점에서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타난 실적물들이 문제를 잉태하게 되어 있고,
관계자들의 행위가 탁상행위로 이루어져서 문제양산의 진원지가 되고 있고,
『21세기찬송가』의 시제품에 실려 있는 작품들에 많은 문제가 쌓여 있다.
그리고 『21세기찬송가』의 시제품은 역주행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Ⅱ. 실적물들이 지니는 문제
한국찬송가공회에 의하여 제작된 실적물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의 발행이 최대의 업적이고,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신작증보판찬송가』의 발행이 두 번째 업적이고,
앞으로 나올 『21세기찬송가』의 모형판인 시제품의 발행이 세 번째 업적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실적물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우리 앞에 존재한다.
한국찬송가공회의 이런 실적물들은 나름대로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는 초보운전의 산물이고,
반짝하다 숨어 버린 『신작증보판찬송가』는 무면허운전의 산물이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1세기찬송가』의 시제품은 역주행의 산물이다.
따라서 한국찬송가공회의 행위에 대한 전체적인 점검이 필요한 실정이다.
Ⅰ) 초보운전의 산물인 『통일찬송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에 대하여 당시에 말들이 많았었다.
찬송가에 관심이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있었고,
그들의 말은 『통일찬송가』가 발간된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당시의 작업은 초보운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열심히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말은 그랬었다.
최근 『통일찬송가』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피며 초보운전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표기된 박자가 부끄럽게 느낄 정도로 멋대로인 다수의 작품들...
가사와 곡의 종지형이 일치하지 않는 많은 수의 작품들...
많은 곡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금칙의 모습들...
가사와 곡의 관계를 언급한다면 문제가 엄청나서 초본운전이라는 말도 과분하다.
『통일찬송가』에 대하여 초보운전이라고 말하기는 해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개편찬송가’와 새찬송가‘를 합본하는 형식이었으니 말이다.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보다 두 권에서 좋은 것들을 하나에 모아놓은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나타난 결과가 초보운전의 모습을 보인다고 이상할 것이 없을 수 있다.
그 당시에 우리의 작품이 별로 삽입되지 않은 이유일 수 있기도 하다.
Ⅱ) 무면허운전의 산물인 『신작증보판찬송가』
한국찬송가공회에서는 얼마 전에 『신작증보판찬송가』를 만들었다 폐기했고,
그 진행과정이 자기들 멋대로 이루어져서 무면허운전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138편이라는 신작을 『통일찬송가』에 부록으로 실은 것도 그렇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의 상당 부분을 자기들 멋대로 수정했으니 말이다.
신앙생활의 교과서인 찬송가를 중간에 멋대로 수정하고, 멋대로 신작을 삽입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를 고칠 수 있는 범위는 교정의 대상일 경우에 한정된다.
분명히 틀린 음표와 글자 정도가 찬송가공회에서 수정할 수 있는 범위이다.
가사의 상당 부분을 고치고, 곡의 흐름이 변할 정도로 고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은 그 때 삼인방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그 중 어떤 사람이 『21세기찬송가』를 제작하는 일의 중심에 있다.
한국찬송가공회에서는 『신작증보판찬송가』에 대하여 폐기했으니 됐다고 말한다.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폐기했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문제이다.
내부적으로 은근슬쩍 처리하고 없었던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면허운전을 했으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Ⅲ) 역주행의 산물인 『21세기찬송가』의 시제품
『통일찬송가』가 발간된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문화가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당시의 문화적인 환경과 지금의 문화적인 환경을 같이 생각한다면 역주행이 된다.
『21세기찬송가』는 말 그대로 21세기를 생각하며 21세기에 맞게 만들어져야 한다.
만약, 『통일찬송가』와 비교하여 같은 정도이거나 못하다면 세월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찬송가도 문화적인 산물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06년 10월 경에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낼 것 같은 『21세기찬송가』는 어떨까?
과거를 감싸 안으며 문화적으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정도일 수 있을까?
1, 2차 시제품의 모습을 보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해짐을 느낀다.
1, 2차 시제품의 경우는 『통일찬송가』와 비교하여 역주행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사와 곡이 모두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그렇다.
『21세기찬송가』의 2차 시제품을 살피면 박자의 흐름에 대한 역주행의 모습이 보인다.
621편 중 잘 된 작품이 165편이고, 박자의 흐름을 왜곡시킨 작품이 173편이다(표 1 참조).
그리고 언급하지 않은 다른 작품들 중에도 많은 작품들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21세기찬송가』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역주행을 확대시키는 주범이다.
전체의 작품 중 조금, 아주 조금만 역주행의 모습을 보여도 좋지 않은 것이어서 그렇다.
<표 1> 『21세기찬송가』 2차시제품의 역주행 현황
좋 은
구 성 |
완 벽 |
22 24 39 62 69 74 98 102 103 110 115 117 123 124 126 133 135 142 145 166 224 238 245 250 275 283 289 333 334 442 451 454 459 476 479 498 526 551 552 563 566 577 582 583 591 599 |
46 |
165 |
약 간 |
8 9 10 15 16 21 3 1 33 42 50 57 59 61 63 67 72 81 83 84 93 106 119 128 138 153 162 168 169 170 171 181 182 183 185 186 187 191 204 205 208 209 214 215 217 254 259 266 274 286 300 302 304 310 316 318 319 326 330 336 340 344 348 350 359 367 369 372 395 396 409 412 413 424 427 430 432 437 448 450 453 455 456 462 466 469 473 474 497 499 501 503 508 510 511 512 520 521 529 539 542 546 547 548 549 560 573 576 578 579 584 587 589 592 595 596 600 602 605 606 |
119 | ||
나 쁜
구 성 |
완 벽 |
4 12 13 14 18 19 28 29 30 41 49 51 54 55 75 76 80 82 87 95 97 108 114 118 120 121 129 136 140 146 163 164 165 175 177 179 199 202 206 207 216 218 221 223 237 241 251 257 263 267 271 272 273 284 291 294 320 322 324 329 332 337 348 356 361 365 366 370 373 374 382 390 401 403 404 416 419 420 428 433 436 438 452 458 467 468 470 478 489 493 495 500 516 523 524 533 538 541 544 545 550 564 565 575 580 581 586 588 607 608 614 |
111 |
173 |
약 간 |
2 6 7 25 26 34 36 38 46 56 73 88 104 105 107 125 132 141 144 148 193 213 235 239 248 249 265 276 277 287 292 293 299 307 308 321 357 363 368 384 397 402 406 414 415 417 425 449 463 465 485 486 491 517 531 532 553 561 568 571 597 603 |
62 |
Ⅲ. 관계자들의 탁상행위
나라의 살림을 맡고 있는 사람들 중 탁상행정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행정행위의 대상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말함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21세기찬송가』의 발간과 관계된 행위에서도 나타난다.
자신들이 할 일과 관련하여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찬송가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별로이다.
필자는 요사이 연구의 큰 흐름을 실증적으로 하는 데 두고 있다.
오랜 세월 지속하던 이론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현실을 살피는 연구를 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많은 내용이 언급될 수 있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의 중심에 이런 연구결과가 있다.
작품 속에서 나온 실증적인 이론에 대하여 관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찬송가』의 발간이 탁상행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의 이해가 필수이다.
작가, 행정가, 기관장 등의 현실 몰이해에 의하여 문제가 누적된다.
찬송가를 사용한 이후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찬송가에 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작가, 행정가, 기관장 등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21세기찬송가』의 시제품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Ⅰ) 탁상행위에 의한 작품활동
찬송가의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일 수 있어야 하고,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작곡자는 음악적으로, 작사자는 문학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상대의 일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의 이해가 되어 있어야 탁상행위가 되지 않는다.
곡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사,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작곡은 탁상행위가 된다.
필자는 작사하는 사람들과 작곡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는데,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인 사람들도 상대의 분야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작사자는 곡을 모른다고 말하고, 작곡자는 곡에 가사를 붙인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곡자는 가사에 곡을 붙인다고 말하면서 행위는 곡에 가사를 붙이는 모습이다.
자기의 일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의 결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대의 일에 대한 이해는 기술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사의 구성과 곡의 구성이 어떤 원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는 정도이면 된다.
혹시 구성능력이 있어서 상대의 일에 대하여 기술적으로 준비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작가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자기 분야의 일에 대해서도 기술적으로 전문가가 되는 일이 쉽지 않으니 말이다.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큰 문제는 가사와 곡의 연결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가사에 곡을 붙이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이 곡에 가사를 붙인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이고,
말은 가사에 곡을 붙인다고 하면서 곡에 가사를 붙이는 행위를 하는 것도 문제이고,
가사와 곡이 이상하게 연결된 작품에 대하여 음악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고,
가사와 곡의 관계를 설명해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우기는 것도 문제이다.
Ⅱ) 탁상행위에 의한 경영활동
교인들의 교과서인 찬송가를 만드는 일은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일이고,
이런 일의 진행은 찬송가의 특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경영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찬송가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준비되지 못했다면 전문가들에게 모든 결정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한국찬송가공회의 전문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 문제가 많다는 『21세기찬송가』,
행정가들의 탁상행위에 의하여 조만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 같다.
지금 발간하려는 『21세기찬송가』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술적인 제품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은 탁상행정의 전형이다.
‘바다이야기’에서 문제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허가한 것과 같은 모습이다.
한국찬송가공에서 출판하려는 『21세기찬송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한국찬송가공회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으면서 출판을 강행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지적을 보고 있었으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하여 이번에는 진행하고 다음에 보완하자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사실이 확정된 이후 대응하겠다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한국찬송가공회에서는 『21세기찬송가』의 판권을 두 출판사에 맡겨 출판할 것 같은데,
많은 변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탁상행정의 가능성이 있다.
두 출판사 중 한 곳은 찬송가출판의 경험이 전혀 없는 곳이어서 문제이고,
두 출판사에 한정하는 것은 다른 출판사들에게 법적 분쟁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고,
오랜 세월 찬송가를 출판하던 출판사들의 출판권을 임의로 제한하는 것도 문제이다.
Ⅲ) 탁상행위에 의한 관리활동
한국찬송가공회에서 출판하는 『21세기찬송가』의 사용은 교단의 승인이 있어야 하고,
진행의 과정에도 교단에서 파송한 사람들이 중심의 위치에서 일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찬송가공회의 활동에 대한 관리의 책임은 교단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만약 『21세기찬송가』에 의하여 문제가 생기게 되면 관리부실의 책임을 져야 한다.
행정과 기술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각 교단의 총회가 관리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한국찬송가공회에서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감수를 받으려는 것 같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감수를 받기 위하여 자료를 가진 사람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감수를 받기 위하여 사람을 보낸 이후에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감수는 완성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불법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일까?
각 교단 총회에서는 한국찬송가공회의 이런 불법을 묵인하지 말아야 한다.
찬송가 사용의 최종 결정권의 중심에 있는 총회장들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지?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를 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심정이다.
총회장들은 『21세기찬송가』 발행의 전 과정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하지 않고 사용을 승인하게 되면 관리에 의한 탁상행위의 주범이 될 것이다.
한국찬송가공회와 관계하고 있는 각 교단에서는 이익 따먹기에 치중하지 않아야 한다.
찬송가판매의 이익나누기와 교단 사람들을 파견하는 일에만 관심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바람직한 찬송가의 출판에 힘을 쏟아야 한다.
교단 내에 찬송가연구기관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써야 하고,
찬송가의 발전에 대한 연구를 촉진할 수 있는 과제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Ⅳ. 작품들에 내재된 문제
찬송가의 곡은 형식을 기본으로 리듬, 선율, 화음 등에 의하여 구성된다.
리듬, 선율, 화음 등의 구성이 아무리 좋아도 형식에 의하여 통제를 받게 된다.
몇 부분인가, 무슨 마디인가, 무슨 박자인가 등의 관점에서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21세기찬송가』의 시제품을 살피면 형식의 관점에서 많은 문제가 보이고,
그 중심에서 박자의 흐름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이상한 모습이 판을 친다.
어떤 사람들은 박자 떼고 연주하면 되니까 박자의 흐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곡자가 박자의 흐름을 이상하게 만들어도 연주에서 보완하면 된다는 논리이다.
연주에서 보완할 수 있으면 작곡에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해괴한 논리로 들린다.
특정한 지점에서 예술적으로 꼭 필요하다면 박자의 흐름이 제한될 수 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박자의 흐름을 제한할 수 있기는 하다.
박자의 선택에서 작곡자들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출발한다.
선택의 폭도 넓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의 제공도 되어 있다.
가사와의 관계설정을 잘 하면 박자의 흐름에 문제가 될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경우 예술적인 필요와 논리적인 판단을 전제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박자의 흐름을 잡는 일에 실패한 한국찬송가공회의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박자의 흐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잘못된 인식에 기인한다.
마디의 구성, 동기의 구성, 마디의 형식 등에 대하여 관계자들의 잘못된 인식이 있다.
박자에 의하여 통제되는 마디의 구성을 아무렇게 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
마디 둘이 모여 하나의 동기를 구성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인식,
갖춘마디의 시각으로 못갖춘마디를 보려는 잘못된 인식 등이 문제이다.
박자의 흐름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꼭 음악적인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곡자가 가사의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보면 가사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음악적으로 문제가 없으면서 박자의 흐름에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고,
이럴 경우 거의 대부분이 가사에의 대응을 잘 하지 못해서 나타난 문제이다.
Ⅰ) 마디의 구성
찬송가를 논하면서 마디의 문제를 언급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런 사실을 말하게 된 것 자체가 과거에의 회귀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런데 현실은 필자의 이런 생각과 관계없이 마디의 구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박자의 흐름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하는 마디가 형식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박자의 표기는 되어 있어도 하나의 마디에서 박자의 흐름이 이탈되는 경우가 많다.
곡에 박자기호를 표기하는 것은 하나의 마디가 박자의 흐름을 담으라는 뜻이다.
4/4이면 4박자의 흐름을, 3/4이면 3박자의 흐름을 마디에 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진행 중에 다른 흐름이 필요하면 변박자의 개념을 적용하여 박자기호를 바꿔야 한다.
3/4 박자로 시작하고 아무 예고도 없이 2박자의 흐름을 담는 것은 문제이다(악보 1 참조).
<악보 1>의 경우 번역자가 곡을 생각하지 않고 가사를 붙여서 나타난 결과이다.
<악보 1> 『21세기찬송가』 2차시제품 458장 전부
<악보 1>의 경우 가사를 생각하면 3박자의 흐름이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
<악보 1>을 노래하면서 3박자의 흐름을 느끼는 일은 불가능하다.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곡에 맞춘다면 몰라도 가사를 생각하면 3박자가 아니다.
이런 경우 가사를 곡에 맞추든지, 가사에 맞춰 박자를 바꾸든지 해야 한다.
<악보 1>을 그대로 노래하는 것은 양복 입고 갓 쓴 사람의 모습과 같다.
박자의 흐름은 <악보 2>와 같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모습이다.
<악보 2>의 경우 4/4 박자의 흐름을 표현하는 일에 장애는 없다.
‘잠 잘 자게’와 ‘고마우신’의 부분에 약간 거북한 점이 있지만,
전체로 4박자의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은 구비되어 있다.
1절을 기준으로 번역자가 가사를 잘 붙여서 나타난 좋은 현상의 하나이다.
<악보 2> 『21세기찬송가』 2차 시제품 62장 전부
구성된 마디에 가사를 붙이든, 가사를 보고 마디를 구성하든 1:1일 수 있어야 한다.
독립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가사의 무리와 곡의 마디가 대등하게 만나야 한다.
‘지난 밤에’ ‘보호하사’의 각각은 의미를 전할 수 있는 가사의 최소단위이고,
동기를 구성하는 각각의 마디는 박자의 흐름을 표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가사와 곡이 만나서 상승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악보 3>은 잘 구성된 동기와 그렇지 못한 동기를 한 작품에서 보여 준다.
‘우리가 기다리던 새벽 하늘’ ‘밝아 온다’의 각각을 동기로 한 것은 좋지만,
‘성도여 찬송하라 사랑의 주’ ‘하나님을’의 각각을 동기로 한 것은 좋지 않다.
첫째 단을 구성하고 좋아 보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둘째 단에서 모방한 것이다.
둘째 단의 경우 ‘성도여 찬송하라’ ‘사랑의 주 하나님을’의 각각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
<악보 3> 『21세기찬송가』 2차시제품 64장 1-2단
<악보 3>의 경우 둘째 단에서 동기의 확대․축소를 말할 수 있다.
‘성도여 찬송하라’를 축소된 한 마디에 의한 동기라고 생각할 수 있고,
‘사랑의 주 하나님을’을 확대된 세 마디에 의한 동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후관계를 생각하지 않은 단견이다.
<악보 3>의 경우는 명백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Ⅱ) 동기의 구성
찬송가의 규모가 어떻게 정해지든 최소단위인 동기를 구성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나의 동기를 구성한 상태에서 반복, 발전, 응용 등에 의하여 곡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의 동기는 박자에 의하여 통제되는 두 개의 마디에 의하여 구성된다.
박자를 어떤 것으로 하든 정해진 박자에 의하여 마디가 통제되고,
이렇게 통제되는 마디 두 개에 의하여 시작으로서의 동기가 구성된다.
마디를 구분하는 세로줄은 형식적으로 붙게 되지 않아야 한다.
세로줄이 붙었다는 사실로 마디로서의 의미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마디다운 마디 둘이 합하여 하나의 동기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붙어 있는 마디를 침범하거나, 침범당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동기의 구성을 <악보 4>와 같이 한 것은 기본적인 흐름을 방기한 행위이다.
<악보 4> 『21세기찬송가』 2차시제품 553장 전부
<악보 4>의 경우 정상한 동기 두 개와 이상한 동기 여섯 개가 보인다.
‘복되어라 우리 가정’의 경우 ‘복되어라’, ‘우리 가정’일 수 있어야 하는데,
‘복되어라 우리 가’ ‘정’으로 노래하게 되어 있어서 아쉽다.
만약 이런 흐름이 필요하면 3/8 ‘복되어라’ 9/8 ‘우리 가정’으로 바꿔야 한다.
이 경우에도 ‘우리 가정’의 부분이 문제이지만, 6/8 보다는 좋다.
<악보 4>와 같은 구성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동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동기가 하나로 느껴질 수 있으면 마디는 어떻게 되든 좋다는 생각 말이다.
‘복되어라 우리 가정’을 동기가 품고 있어서 전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동기가 두 개의 마디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기도 살고, 마디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아쉬운 상황이다.
어떤 사람들은 필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에 대하여 “숲을 보라”고 충고한다.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보아서 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필자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무를 말하면서 숲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고,
나무가 있어야 숲이 있고, 숲도 나무를 생각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이상하다.
동기는 확대와 축소에 의하여 변할 수 있어서 자유로운 구성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축소에 의한 한 마디의 동기, 확대에 의한 세 마디의 동기 등이 가능하다.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 등과 같은 다양한 동기를 활용하면 가능성이 많아지게 된다.
예술적인 필요와 논리적인 판단에 의하여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된다.
<악보 4>에 대하여 동기의 확대와 축소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럴 수 있으면 된다.
Ⅲ) 마디의 형식
찬송곡을 구성하는 마디의 형식에는 갖춘마디와 못갖춘마디가 있으며,
어떤 마디로 하는가에 의하여 다른 가능성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현실적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우리의 경우 갖춘마디와 못갖춘마디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갖춘마디의 시각으로 못갖춘마디를 보고 있어서 문제가 많다.
정박의 흐름에 의한 갖춘마디와 변박의 흐름에 의한 못갖춘마디는 전혀 다르다.
4/4 박자의 갖춘마디는 강, 약, 중강, 약의 흐름을 제공하고,
4/4 박자의 1박 못갖춘마디는 약, 강, 약, 중강의 흐름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못갖춘마디 시작 지점의 차이에 의하여 더 확대될 수 있다.
갖춘마디의 시각에서 못갖춘마디를 보게 되지 않을 경우에 그럴 수 있다.
못갖춘마디에 대한 왜곡된 시각의 문제는 못갖춘마디의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못갖춘마디에 대하여 언급하면 마디 이후부터 말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고,
이런 편견이 못갖춘마디라는 좋은 흐름을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현상을 초래한다.
갖춘마디가 지닌 한정된 가능성에 못갖춘마디에 의한 다양한 변화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렇게 할 수 없도록 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악보 5>의 경우는 갖춘마디의 시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못갖춘마디의 작품이다.
이 경우 못갖춘마디의 부분은 계산하지 않고 갖춘마디의 부분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너’는 계산하지 않고 ‘예수께 조용히 나와’가 관심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며 곡의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
<악보 6>과 같이 못갖춘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아서이다.
<악보 5> 『21세기찬송가』 2차시제품 533장 1-2단
<악보 6> 『21세기찬송가』 542징 1-2단
『21세기 찬송가』의 2차시제품에는 못갖춘마디로 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작품들 중 <악보 5>와 같이 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하여 아무런 판단 없이 이제까지 지내왔고,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그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된다.
누구도 관심하지 않고 역주행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Ⅴ. 정지하는 말
금년(2006년) 내에 출판될 『21세기찬송가』는 어떤 모습일까?
오랜 세월 한국찬송가공회와 씨름했던 사람으로 기대와 우려의 마음이 있다.
『통일찬송가』와 비교하여 좋아지고, 시제품에서 지적된 문제가 해결될 것을 기대하고,
시작하는 말에서 언급한 역주행의 모습이 굳어지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대의 상황이 연출되기를 바라지만, 우려의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더 많아서이다.
한국찬송가공회의 역주행은 시간과 행위와 문화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통일찬송가』와 비교하여 갖거나 못하면 시간 역주행이 되고,
『통일찬송가』에서 문제가 있다고 수정한 것이 개악이면 행위 역주행이 되고,
문화적으로 발전한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면 문화 역주행이 된다.
따라서 『21세기찬송가』는 이런 관점에서 문제가 없어야 한다.
21세기를 지향한다는 『21세기찬송가』는 21세기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세기를 정리하며 바람직한 찬송가문화를 담아낼 수 있었어야 하고,
우리의 찬송가문화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여 찬송가의 모형을 제시할 수 있었어야 한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예산을 쓰며(100억원 정도) 일했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은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지금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하는데...
(2006년 9월 4일 6시 4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