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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기영

구름위집 2012. 1. 10. 13:21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사랑의 이름으로’ 가정 버린 당대의 예술가, 과연 용서해야 하나

‘자유연애’가 낭만과 신(新)사고의 상징이던 1930년대에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대의 작곡가이자 성악가로 명성을 날리던 테너 안기영 교수. 병중의 조강지처와 세 아이를 버려두고 여제자와 상하이로 도피했던 그가 4년 만에 귀국하자, 경성은 한바탕 소동에 휩싸인다. ‘예술가적 기질’이라는 말로 그를 용서하자는 주장이 ‘연애담’이 되어 퍼져나가니, 버림받은 아내는 남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잡지에 기고해 무너진 사랑을 탄식하는데….

1932년 4월11일 저녁, 이화여전 후원회장 윤치호는 교수단을 자택으로 초대했다. 새 학기를 맞아 교수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학교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날 아침, 음악과의 안기영 교수는 조강지처 이성규에게 학교 행사 때문에 늦겠다는 말을 남기고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섰다. 행사는 그다지 늦지 않게 끝났다. 그러나 그날 밤 안기영은 귀가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소식이 없었다. 하얼빈에서 편지가 온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나는 러시아로 갈 것이오. 피아노와 집을 팔고 살림도 줄이시오. 러시아로 간 다음엔 주소도 알리지 않겠으니 기다리지 마시오.’

서른세 살의 젊은 교수 안기영은 작곡가이자 조선 제일의 테너로 이름 높았다. 이화여대 교가를 작곡한 사람이 바로 안기영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안기영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직장과 임신한 아내, 두 딸이 기다리는 가정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돌연 해외로 떠났다. 그로부터 몇 년간 안기영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베이징에 산다더라, 상하이에서 고생한다더라, 도쿄에 건너 갔다더라 하는 풍문만이 간혹 들릴 따름이었다.

안기영은 4년이 지난 1936년 3월12일에야 경성역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서울에 돌아온 안기영은 무슨 연유인지 아내와 세 아이가 기다리는 아현정(町) 자택 대신 관동정 부친의 집에서 묵었다.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칩거하면서 귀국 음악회를 준비했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팔순의 장모가 사위 얼굴 한 번 보면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겠다며 사람을 놓아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동안 태어난 네 살배기 아들조차 보러 가지 않았다.

‘안기영 귀국 독창회’는 1936년 4월11일 밤,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날은 그가 집을 나간 지 4주년이 되는 ‘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연을 이틀 앞둔 4월9일, 관할 본정경찰서는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돌연 공연허가를 취소했다. 귀국 독창회의 주제는 ‘사랑의 찬가’였다. 서슬이 시퍼렇던 일본 경찰이지만, 정치적 목적의 집회도 아니고 순수한 음악회를 강제로 금지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사랑의 찬가’도 때로는 심각한 ‘치안상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음악회 일주일 전, 관동정 안기영의 처소에 평소 친분이 있던 김 목사가 찾아왔다. 김 목사는 안기영의 경솔함을 꾸짖었다.

“자신의 과거 행동을 뉘우치는 바가 있다면 좀더 근신할 것이지, 세상의 눈도 있거늘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음악회는 무엇이냐?”

안기영이라고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느냐? 음악회를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김 목사는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분을 삭이며 돌아갔다. 음악회 소식에 더 분개한 것은 안기영의 처가 식구들이었다. 처가 젊은이들이 음악회에 떼지어 몰려가 풍파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 목사는 본정경찰서를 찾아가 안기영의 음악회를 허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기독교계와 교육계의 뜻을 전했다.

“안기영은 한때 이화여전 교수로 있으면서 교회에서도 신임을 받았소. 그러나 어느 날 자기 제자 김현순을 데리고 해외로 달아나 이화여전은 물론 일반교육계와 교회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소. 이제 돌아와서 자기의 과거를 청산하려는 성의 있는 빛도 없이 장한 일이나 한 듯이 음악회를 여는 것은 교육계나 일반 사회에 영향이 좋지 못할 것이오.”

안기영은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고국을 박차고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얼빈으로 떠난 지 며칠 후, 이웃에 살던 제자 김현순이 슬그머니 집을 나가 하얼빈에서 그와 합류했다. 해외유랑 4년 내내 안기영의 곁에는 늘 김현순이 있었다. 도쿄에서는 사랑의 결실인 딸까지 얻었다. 해외유랑은 ‘사랑의 망명’이었던 셈이다.

여학교 교수가 가족을 버리고 제자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는 것은 사회 통념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안기영도 자신의 허물을 모르지 않았다. 음악회는 그가 ‘속죄’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고토에 돌아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4년이란 세월동안 고생을 하면서도 꾸준히 성악을 연구했습니다. 조선 음악계에 기여하여 속죄의 만분지일이나마 하려고 고토로 돌아왔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눈물과 정과 피로 떠나간 우리는 다시 눈물과 정과 끓는 피로써 조선 음악계에 기여하렵니다. 다만 이 한 가지 마음과 염원을 가지고 허물 많은 우리들의 앞길을 개척하렵니다. 오직 여러분의 뼈저린 채찍질과 지도를 기다릴 뿐입니다.”

음악가가 음악으로 자신의 죄를 씻겠다는 것은 일면 타당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생각하는 속죄의 방법은 달랐다. 안기영이 김현순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던 4년 동안, 그의 아내와 세 자녀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릇된 일을 하여도 나의 남편은 남편이요, 그 애들의 아버지는 아버지이니 그에게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욕합니까. 다만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가족들은 그저 회개하고 가정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데, 안기영은 대중 앞에서 ‘사랑의 찬가’를 불러 자신의 허물을 속죄하려 했다. 누구를 위한 ‘사랑의 찬가’인가. 가족에게 그것은 속죄가 아니라 또 한번 가슴에 못을 박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김 목사의 청원을 접수한 경찰은 아내 이성규를 불러 전후사정을 들었다.

“그가 돌아왔대도 아직 만나 이야기도 못해보았는데, 음악회를 연다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집안 사람들이 음악회에서 항의시위를 하리라는 말이 있어 말렸습니다. YMCA 사람들도 음악회에서 항의시위를 하겠다기에 그럴 것 없다고 말렸습니다. 음악회야 이후에도 할 수 있는 것이라, 공연히 지금 열어 망신당하는 것보다야 그만 두는 것이 나을 듯하나, 지금 나로서야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딸애들도 아버지가 음악회를 하다가 망신이나 당하면 어떡하나 애태우고 있어요.” (‘조선일보’ 1936년 4월12일자)

경찰은 ‘보안상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인륜상’ 공연을 허가할 수 없었다. 안기영과 김현순의 ‘사랑의 망명’ 4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안기영 귀국 독창회’는 가족과 YMCA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취소되고 말았다.

1928년 안기영은 미국 오리건주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에서 3년간 음악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그의 유학기간 아내 이성규는 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하며 혼자 힘으로 근근이 두 딸을 키웠다. 귀국한 안기영은 아현리에 집을 장만하고,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부임했다. 남은 생애는 음악과 가족을 위해 헌신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안기영의 결심을 뒤흔들어놓았다.

사랑의 탈출

김현순은 아현리에 사는 이화여전 학생으로 안기영이 조직한 음악 연구단체 성우회(聲友會)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소프라노였다. 탁월한 음색을 지닌 데다 성실한 김현순을 안기영은 남달리 아꼈다. 이웃에 살아 아침마다 같이 등교했고, 가끔씩 산보도 하고 음악회도 다녔다.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순수한 사제의 만남이었고, 조선 음악계를 이끌고 갈 예술가 사이의 교제였다. 그러나 1932년 김현순이 이화여전을 졸업할 무렵 두 사람의 관계는 ‘세상이 용납하기 어려운 관계’로 발전했다. 어려울 때 늘 함께 있어준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 든 아이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보았지만, ‘운명적 사랑’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외박이 잦아졌다. 김현순과 함께 정사(情死)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죽기에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았다.

사제 사이로 넘지 못할 장벽을 넘고 뚫지 못할 길을 뚫은 그네들은 한동안 큐피드의 화살을 기쁨으로 맞이했으나 마침내 최후의 날이 오게 되매 김현순은 금강산이나 사람 모르는 곳으로 가서 죽어버리자고 애원했다.

“난 살기 싫어요. 꼭 죽어요” 하고 김현순이 야단을 치면,

“죽긴 왜 죽어요. 그래도 살아야지요. 조선서 못살면 중국으로 가고 게서도 못살면 남양(南洋)이라도 가서 살아야지요” 하고 안기영이 위로했다

하루는 상하이로 탈출하려고 부산행 차표를 사서 경부선 열차에 탔다가 대구에서 되돌아왔다.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달 후에는 신징으로 가려고 북행열차를 탔다가 사리원에서 되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느냐는 아내의 힐책에 안기영은 몸을 피할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있다고만 얼버무렸다. 도피에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김현순을 잊고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안기영은 아내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다.

“내가 사라지거든 가사 일체를 정리해 가지고 친정 근처에 가서 살아요.”

이화여전을 졸업한 김현순은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준비했다. 김현순의 부친은 서울에서도 내로라하는 갑부였다. 김현순이 유학을 떠나면 안기영은 더는 서울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 기계적으로 교편을 잡는 것보다는 좀더 자유롭게 예술혼을 떨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는 하얼빈에 있는 친구 변홍규 목사를 생각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면 러시아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932년 4월11일, 안기영은 150원과 트렁크 하나를 챙겨 북행열차에 올라탔다. 아내는 물론 김현순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얼빈에 도착하니 홀가분해지기는커녕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하얼빈 변홍규의 집에서 나는 괴로워 밤잠을 못 잤습니다. 외로운 기러기같이 짝 잃은 현순이는 어떻게 지내나. 나를 믿고 따르던 내 제자들은 어찌할까. 마음속의 가시바늘은 때때로 내 심장을 요리조리 찔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못해 그곳에 있다는 것을 현순이에게 편지해 알렸습니다. 얼마 후 현순이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하얼빈으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더욱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남이 애지중지 기른 딸! 장래가 촉망되는 조선의 소프라노가 나 때문에 혹시 장래를 그르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나는 눈물로 참회했습니다. 허나 끓어오르는 사랑의 정열은 참을 길이 없어 신징으로 마중 가려고 변홍규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변홍규는 “가정불화는 이해하지만 연애방랑이야 어디 말이 되오?”하며 못 가게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가슴 속엔 사랑 그것이 벅차올라 현순이를 맞으러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네는 목사요 나는 예술가일세.”

한마디 말을 던지고 나는 표연히 현순이를 맞으러 갔습니다. 북만(北滿)의 봄빛이 아직 오지도 않은 찬바람 치는 이역에서 그를 만날 때 우리는 서로 붙들고 포옹하고 눈물 속에서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신징에서 김현순과 재회한 안기영은 러시아 유학을 포기하고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병원을 개업한 김현순의 오빠를 찾아가 여비라도 넉넉히 얻어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현순의 오빠를 찾아갈 때만 해도 같은 젊은이로서 그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오빠는 “나는 안 선생을 믿었는데…” 하며 안기영을 싸늘하게 대했다. 김현순에게는 “너는 정말로 그이를 사랑하느냐” “헤어질 수는 없느냐”며 갈라설 것을 강권했다. 밀라노로 갈 여비라도 얻으려던 안기영과 김현순은 상하이로 발길을 돌렸다.

고난의 도피생활

상하이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은 상하이에서 가장 허름한 단칸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살림이라곤 식기와 화덕이 전부였다. 중국 여배우를 상대로 음악 개인교습을 했지만 수입이 신통치 않았다. 성격 급한 여배우들은 몇 달 교습을 받고도 노래솜씨가 나아지지 않자 교습을 그만두었다. 돈이 궁해 찬도 없는 밥을 지어먹고, 딱딱하고 거친 침대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백만장자의 딸로 태어나 고생 한번 하지 않고 자란 김현순의 충격은 엄청났다. 평생 사랑하고만 살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는 처음 떠날 때 약간의 돈이 있었으나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오자 돈이 떨어졌지요. 그래서 상하이의 1년 반은 그야말로 퍽이나 고생을 하였지요. 상하이 있을 때가 가장 고생이었지요. 그렇게 고생을 하던 때 어떤 ‘댄스홀’에서 마침 흑인가수가 월급을 더 많이 주는 다른 데로 옮겨가고 자리가 비었는데 나에게 월급 450원을 줄 테니 오라고 했어요. 나는 딱 잘라 거절해버렸지요. 아무리 생활이 궁하기로서니 나의 예술가적 양심을 그렇게 쉽사리 팔아버릴 수야 있느냐 하는 생각이었지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안기영의 귀국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1928년 6월28일자.

생계가 막막해지자 김현순은 베이징의 오빠 집으로 돌아갔다. 김현순은 돈이 생기는 대로 안기영에게 보냈다. 오빠한테 구두 산다고 10원을 타다가 6원짜리를 사고 4원을 부치는 식이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노래도 불렀으나 생계에는 별반 보탬이 되지 않았다. 김현순은 오빠 집에서 돈을 마련해 허름한 사랑의 보금자리가 있는 상하이로 돌아왔다.

안기영은 서양 사람의 소개로 교회 찬양대에 들어가 합창지도를 했다. 미국 계통의 교회라 영어나 음악이나 모두 잘 통해 일에도 재미를 붙이고 그럭저럭 생계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안락한 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서울 있는 어떤 목사가 상하이 미국인 목사에게 안기영 일행의 과오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미국인 목사는 안기영 일행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여 해결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조선에 있는 목사에게 안기영이 본부인과 이혼하고 김현순과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조선에 있는 목사의 거부로 이혼과 결혼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지 않았다. 안기영 일행은 더 이상 교회에 다닐 면목이 없어 찬양대 일을 그만두었다. 다시 우중충한 방안에 들어앉아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화투도 치고, 때로는 산보도 다녔다.

나는 그때 조선의 이혼제도, 결혼제도에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와 정식으로 결혼할 수 없는 비애! 싫은 아내와 이혼할 수 없는 고민! 이 때문에 젊은 조선 청년남녀의 고민이 그 얼마나 컸을까요?

안기영과 김현순은 조선의 결혼과 이혼제도의 불합리성을 뼈저리게 느끼며, 1년 반 동안의 상하이 생활을 청산하고 도쿄로 갔다. 도쿄의 분위기는 상하이와는 사뭇 달랐다. 안기영이 도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재동경조선음악가협회’에서 환영회까지 열어주었다. 조선인 음악가의 도움으로 집과 개인교수 자리를 어렵지 않게 구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어학공부도 하고, 음악회도 다니고, 오케스트라 지휘법도 공부했다.

도쿄에서 새살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현순이 건강한 딸을 낳았다. 안기영은 남쪽지방 상하이에서 생긴 아이라 하여 ‘남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김현순의 부친은 딸이 아이까지 낳자 안기영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놈들 소행은 고약하지만 어린애를 굶겨 죽일 수야 있나.”

김현순의 부친은 매월 약간씩 생활비도 보내주고 피아노도 사주었다. 피아노 개인교수까지 할 수 있게 되자 살림살이는 몰라보게 나아졌다. 형편이 풀리자 고국에 대한 향수가 물밀듯 밀려왔다. 어떻게 하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허물을 속죄하고 조선 악단에 한줌이라도 보탬이 될까.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리던 안기영과 김현순은 결국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얼빈으로 ‘사랑의 망명’을 떠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안기영과 김현순이 고난의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짓는 비운의 여인이 있었다. 안기영의 본처 이성규였다. 안기영과 이성규도 뜨거운 사랑 끝에 맺어진 부부였다.

이성규는 1899년생으로 남편 안기영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서울 중림정 부유한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되던 해부터 공덕정 교회여학교에서 교원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공덕리교회 윤성열 목사의 소개로 안기영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당시 안기영은 연희전문 학생이었다. 안기영은 이성규가 근무하는 학교에 가끔씩 와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얼마 후 이성규는 집에서 가까운 아현여학교로 전근했다. 그해 여름수련회에서 우연히 안기영을 다시 만났다. 안기영은 이성규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완고한 가정에서 자라난 젊은 여교사 이성규는 얼굴을 붉힐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해 겨울 이성규는 모교의 주선으로 대전공립보통학교로 전근했다. 당시 공립학교는 사립에 비해 교원의 처우가 훨씬 나았다.

이성규가 대전으로 이주한 지 얼마 후 안기영의 연애편지가 날아왔다. 이성규는 그 편지를 받고서 무슨 못 지을 죄나 범한 듯 큰 봉변이나 만난 듯 당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기영에게 마음이 끌렸다.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두려움에 가슴 조이며 답장을 썼다. 이후 두 사람은 수시로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남편의 배신에 비애를 느낀 아내 이성규는 1936년 5월 ‘중앙’에 남편 안기영에게 보내는 공개장 ‘무너진 사랑의 탑’을 기고한다.

해가 바뀌자 3·1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안기영은 북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길에 오르기 전 안기영은 이성규에게 약혼을 청했다. 이성규의 집에서는 처음엔 안기영의 집안이 가난한 것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안기영을 만나본 후에는 사람이 쓸 만하다며 약혼을 허락했다.

상하이로 간 안기영은 차장 노릇을 하면서 고학으로 진링(金陵)대학을 다녔다. 이성규는 개성 정화여학교와 전남 창평에 있는 창신여학교에 교편을 잡았다. 그들은 열렬한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성공과 건강을 빌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곤 했다.

처녀를 붙잡아놓기만 하고 결혼을 못해 미안하다는 간곡한 사연. 보고 싶다는 하소연. 상하이로 오라는 권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학비 때문에 못 간다는 이야기. 서신이 올 때마다 나는 맘을 졸이면서 답장을 썼다. 나는 아무 문제도 없으니 미안하단 생각 말고 성공하고 돌아오란 말. 상하이로 한시 바삐 가보고 싶으나 집에서 허락지 않아 섭섭하다는 이야기. 사랑의 글월은 그동안에 몇 장이 오고 몇 장이 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해가 여섯 번 바뀌었다. 고국을 떠난 지 만 5년이 지난 1924년 봄, 안기영은 소식도 없이 서울로 돌아와서 창평에 있는 이성규에게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를 쳤다. 뜻밖의 전보를 받은 이성규는 행장도 수습하지 못한 채 서둘러 상경했다. 이성규는 6년 만에 만난 약혼자가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지만, 안기영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졌다.

“내가 편지로 이런 소리를 하면 당신이 자살할지도 몰라서 별안간 온 것이오. 나는 집안이 몹시 가난한 만큼 공부를 다 마칠 때까지는 결혼식을 할 수 없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거든 다른 사람과 혼인하오.”

이성규는 공부를 마치고 성공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리겠으니 다시 공부의 길을 떠나라며 안기영을 달랬다. 이성규의 부모는 안기영에게 해외로 갈 때 가더라도 결혼식만은 치르고 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안기영은 못 이기는 척 결혼을 승낙했다.

상하이에서 공부하다 나온 학생이 결혼할 재력이 있을 리 없고, 가난한 안기영의 집에서 도와줄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이성규는 8년간 교원생활을 하며 저축한 돈 300원을 털어 결혼식 비용을 치르고 신혼집과 신접살림을 장만했다.

결혼 후 안기영은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 메리 영의 조교가 되었다가 얼마 후 정식 사무원으로 승진했다. 매월 75원의 월급을 받게 되자 안기영 부부의 생활은 안정을 찾았다. 그렇다고 생활에 여유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안기영의 월급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미국 유학비를 저축하고 나면, 두 부부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비록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서로 의지하며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첫딸 영식이가 태어났다. 둘째딸 화식이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25년 1월1일 태어났다. 안기영은 둘째딸이 태어난 지 채 2주일도 지나기 전인 1월12일,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성규는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남편의 출국준비를 도왔다. 핏덩어리 신생아를 업고 살림을 정리해 친정으로 이사까지 했다. 안기영은 그동안에 저축한 돈 300원, 메리 영이 보조해준 돈 200원, 빚으로 얻은 돈 300원, 도합 800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아내 이성규에게는 두 아이의 양육과 자신의 생계, 그리고 남편이 유학 떠나면서 남긴 300원의 빚이 고스란히 남았다.

이성규는 다시 생활전선으로 내몰려 아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가 첫 출근을 한 날은 1월20일. 남편을 보낸 지 열흘도 안되었고, 둘째딸을 낳은 지 삼칠일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한 채 산꼭대기에 있는 학교로 걸어 다니던 이성규의 몸에 탈이 생겼다.

학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이 자주 나더니 결국엔 류마티스가 생겼다. 월봉 44원으로 병 고치랴, 살림하랴, 빚 갚으랴. 이때의 고생은 정말로 심각했다. 유일한 희망은 미국으로 간 남편의 성공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픈 몸으로 두 아이를 기르고 빚 갚아가고 하는 것쯤은 지당히 해야 할 일이었지, 짜증낼 일이 아니었다. 그가 미국 갈 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꼭 편지 하자던 약속 그 즐거운 약속을 지켜서 그에게 편지를 쓸 때는 괴로움도 아픔도 모두 없어지고 나는 무척 행복한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활은 3년 동안 계속되었다.

1928년 6월26일, 안기영은 마침내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성규는 반가움과 기쁨에 넘쳐 두 아이를 데리고 부산까지 마중을 나갔다. 3년 만에 만난 부부는 기차간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선교부에서 학자금을 얻어 힘들지 않게 공부했다” “메리 영의 소개로 수양아버지를 얻어 피아노도 장만했다” “한번은 맹장염을 몹시 앓았다”…. 3년간 쌓이고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경부선 천리 길도 짧았다.

안기영이 귀국한 후, 아현리에 집을 얻어 3년 만에 단란한 생활로 돌아갔다. 9월 신학기부터 안기영은 이화여전 음악과에 강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4월 첫아들 종식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낳고 이성규의 류머티즘이 도졌다. 한때 명랑하고 환희에 찼던 집안은 이성규의 병으로 인해 침울해졌다.

이성규의 병이 낫자 이번엔 종식이가 죽었다. 이성규는 사람의 생활처럼 무상하고 기복이 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강사 수입으로 집세까지 내가며 살림하기는 몹시 힘이 들었다. 안기영을 아끼는 메리 영은 딱한 사정을 듣고 집 한 채를 장만하라며 얼마간 변통해주었다. 부족한 집값은 새로 산 집을 담보로 빌렸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김현순의 부친 김태상이었다.

안기영은 강사생활 1년 만에 정식교수가 되었다. 매달 150원의 봉급을 받게 되자 형편은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본가에 40원씩 부쳐주고 50원씩 빚을 갚고 나면 그리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이듬해 10월 또 아들을 낳았으나 그 아이는 태어난 지 21일 만에 죽었다. 이성규는 또다시 류머티즘이 도져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성규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남편과 김현순 사이의 풍문이 들렸다. 남편의 인격을 철석같이 믿었던 이성규는 풍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안기영은 항상 “오늘의 성공은 모두가 당신의 숨은 공로요. 나의 영광이 당신한테로 가는 영광이요”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 남편이 변심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밤낮 단둘이서 산보를 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심각하다.”

모든 불쾌한 소문이 들릴 때마다 나는 깨끗이 그 소문을 묻고 싶었다. 나는 그를 믿었다. 의심은 말자, 병석에 누워 있는 나를 버리고 그가 산보를 하다니 천부당한 말이다. 저 친절하고 세심한 그가 나를 잊을 리가 있느냐. 허나 그의 외출이 날로 잦아지는 것은 어쩐 일이냐.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불규칙해지는 것은 무슨 일인가. 산보를 자주하는 것은 소화불량 때문에 그렇다는데 믿자. 모든 것을 의심해서는 못 쓴다. 그러나 병석에 누워 있는 나의 마음은 적잖이 흔들렸다.

순회음악을 하고 돌아올 때 현순이 집엘 먼저 들러온다는 말. 현순이와 함께 금강산엘 갔었다는 이야기. 영원한 처녀로서 예술에 정진할 것인즉 선생님의 아내에 대한 사랑에는 침범치 않겠다는 현순이의 말. 나이 어린 제자를 어찌 사랑하겠는가 하는 남편의 말. 나는 모든 소문과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다만 아내로서의 의무, 어머니로서의 책무에 충실함으로써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 하였다.

1932년 2월경 이성규가 겨우 지팡이를 짚고 일어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을 무렵 안기영은 항상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귀가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안기영은 김현순에게 작곡을 가르치느라 늦었다고 변명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탈출시도가 있었고, 4월11일 안기영은 기어코 국경을 넘었다.

안기영이 해외로 가겠다고 할 때 이성규는 김현순까지 데리고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얼빈에서 보내온 남편의 편지를 받고 이성규는 남편이 왜 가정을 버리고 행방을 감추었는지 몹시 궁금해했다. 이성규는 집문서를 잡히고 빚을 얻어 하얼빈으로 남편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앓고 난 몸이라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이틀 동안 변홍규 목사의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 이성규는 남편 뒤를 더는 쫓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이성규는 두 사람이 사랑의 도피를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성규는 두 사람이 상하이에서 동거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서야 모든 것을 깨끗이 단념하고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이성규는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가 임신 4개월째였다. 세 식구의 생계를 위해 하는 수 없이 피아노를 팔아 600원을 마련했다. 그러자 상하이에서 안기영의 편지가 왔다. 신문에서 떠드는 바람에 서울에 돌아갈 수 없다는 말과 고생이 심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은 이성규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피아노를 판 돈 중 50원을 보내주었다. 악단에 나서게 되면 필요할지 몰라 예복과 구두도 보내주었다. 그후 보내준 물건과 돈을 잘 받았다는 편지가 큰딸 영식이 앞으로 왔다. 자기는 이미 더럽힌 몸이라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자기를 잊어버리라는 사연이 씌어 있었다.

소득이 없으니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이성규는 집을 팔아서 아현리 친정 부근의 조그마한 집으로 옮겨왔다. 남은 돈으로 그동안의 채무를 청산했다. 안기영이 떠난 지 여섯 달 만에 큰아들 충식이가 태어났다. 그때까지는 피아노와 집을 판 돈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고 해산 준비를 했다. 상하이로 가끔 생활비를 청구해보았으나, 안기영은 생활비를 보내주는 대신 이혼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성규가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생활비가 바닥났다. 다행히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성규는 또다시 교원생활을 시작했다.

‘남자의 간통은 무죄’

이성규는 안기영과 김현순이 두 손을 꼭 잡고 경성역에 나타났을 때 애써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낳았어도,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라고만 할뿐, 아무런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실은 이성규가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당시 형법에도 간통죄는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간통죄는 ‘부인 및 그 상간자(相姦者)의 간통에 대하여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하여 남편의 간통에는 면죄부를 주었다. 남편이 애인과 함께 무대에 올라 ‘사랑의 찬가’를 불러도 망신을 주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을 간통죄 처벌 대상으로 올리는 문제가 1930년 일본 의회에서 한 차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첩을 둔 의원들의 ‘조직적 반발’로 입법화되지는 않았다. 남편과 부인 모두 간통죄의 처벌 대상이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다. 형법 제정 당시 남편을 처벌대상으로 추가한 간통죄는 국회의원 재석원수(110명)의 과반수(56표)에서 겨우 한 표가 많은 57표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안기영의 과오가 속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국 후 안기영은 조선 악단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경성음악전문학원 교수가 되어 성악가를 양성했고, 성악가, 작곡가, 평론가로 정열적으로 일했다. ‘향토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악극을 개발했고, 광복 이후에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으로 음악계를 주도했다. 1950년 월북한 안기영은 평양음악무용대학 성악담당 교수로 활동했고 19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로교수로 후진을 양성했다. 김현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으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다.

안기영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드높던 1936년 6월, 문학평론가 백철은 ‘가인(歌人)을 구하라’는 평론을 발표, 홀로 ‘안기영 구하기’에 나섰다. 백철은 ‘예술가는 예술을 가지고 평가해야지 한낱 세속적 윤리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은 일상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인은 보편적 윤리를 가지고 평가해야지 한낱 예술적 성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예술적 측면에서 안기영은 탁월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 그는 허물 많은 일상인이었다.

민족음악운동을 처음으로 주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하였고, 예술가곡 분야를 개척하였고, 우리나라 창작 오페라의 원형인 향토가극을 창안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동요와 신민요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있게 하는데도 많은 기여를 하여 광복 후 음악 교과서에 가장 많이 곡이 수록된 주인공인 안기영님(민경찬 2002<안기영 선생을 통해 본 우리네 근현대 음악 이야기 : 해방 후 음악교과서에 가장 많이 수록된 곡의 주인공> ≪남과 북이 함께 하는 민족21≫15, 민족21, 126∼129쪽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1)은 1988년 해금될 때까지 남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http://www.nl.go.kr/nl/index.jsp)에 들러 그와 관련한 글을 살펴보아다가 그의 가정생활을 전한 글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A기자 1939 <安基永, 金顯順氏家庭 : 同道夫婦의 生活打診> ≪朝光≫2월호, 朝鮮日報社出版部, 164∼169쪽). 이 글에서는 안기영님의 당시 부인인 김현순님도 함께 음악 활동을 하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민족음악과 관련하여 안기영님 위주의 글과 사뭇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귀한 자료라고 여겨진다. 민족음악 또는 한국음악사와 관련하여 김현순님의 족적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 시기의 글인 까닭에 한자가 혼용되고 오늘날 한글 표기와 많이 다른데, 가능한 원문을 그대로 살리면서 현대 한글 표기법으로 소개한다.

안기영, 김현순하면 그 예술적인 음악이 서로의 폐부를 찔러 아니 끌리랴 아니 끌릴 수 없이 없이 한 개의 물체로 융합이 되는 듯 끌려 들어감을 어찌 하는 수 없이 필야(必也)에 사제의 분의(分義)임에도 눈이 어두워 비련의 사랑을 속삭이며 해외로 전전표류하다 다시 고토(故土)로 돌아와 어금(於今)엔 법적 의식도 무시하고 오직 예술과 사랑으로 가정을 얽어가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 음악 가정은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부부동도(夫婦同道 : 남편과 아내가 같은 길을 걸음. 원문에는 ‘失婦同道’로 되어 있다)의 예술 타진을 하여 보기로 기자는 북아현정 그들의 가정을 찾아갔다.

내외분을 다 모시고 한자리에 말씀을 들어야 할 텐데 마침 때가 저녁때라 부인께서는 저녁거리를 마련하러 외출을 하신 모양, 쓸쓸하게도 안씨만이 혼자서 맞아주신다.

“부인께서 언제쯤 들어오실까요”

“네 현순이요 곧 들어올 겝니다”

안시의 대답에 기자는 안심하고 앉아서 한 대의 담배를 붙여 물고 정숙과 벗을 하며 있노라니 찌꿍하고 대문소리가 난다.

“들어옵니다”

대문 소리를 내는 데는 부인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 듯이 단정적으로 부인의 귀의(歸意)를 알린다. 아니나 다르랴 그것은 부인이 틀림없었다.

“엄마!”

“엄마!”

애들이 마주 달려 나가는 듯 콩콩콩 땅이 울리는 발자욱 소리.

그러나 애들이 엄마의 치마 귀를 붙들고 늘어질 여유도 없게 안씨 곧 달려 나가 기자의 내의(來意)를 전한다. 안씨 뒤에 달려 들어오시는 부인, 언제나 비애(悲哀)의 표정은 짓지 못할 것 같은 미소 그대로 된 명랑한 얼굴에 벙글벙글 웃는 웃음까지 명랑하시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왜 또 꺼내 들추려고 하세요”

“아니 뭐 그런 의미로 오신 것은 아니라”

기자 대답하기 전 안씨 곧 부인의 말을 받아 안심하고 물음에 응하라는 뜻을 보인다.

“내외 분이 같은 음악의 길을 걸으시며 지나시는 재미가 어떠하십니까”

“예 물론 이상이 맞고 예술을 서로 이해하고 지나게 되니까 재미있는 편이지요”

“우리야 뭐 어디 법에서 부부로 허하여 주어야지요”

아무리 사랑과 예술의 융합 속에서 맺은 부부라 하여도 세상이 완전한 부부는 허하여 주지를 않은 것 같은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놓이지를 못하는 듯 한 마디였다.

“부인께서도 성악을 전문으로 연구하였지요?”

“예 피아노도 할 줄 압니다”

“안선생은 부인의 성악을 어떻게 보십니까?”기자의 물음에 안씨 부인의 성악평에 입을 열려는 순간

“저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부인 의자에서 허리를 편다.

“지금 안선생께서 김선생 성악평이 나오실텐데 못나가십니다. 들으시고 답변을 하셔야죠”

하고 기자 일어선 김씨를 붙들어 앉히려 하나 종내 웃음으로 떼고 나가버리신다.

“현순이야 음색이 이쁘지요. 음색이 폐부를 찌르는 맛이 있습니다. 저 이전(梨專, 이화여자전문학교) 있을 때도 현순이는 이 음색 이쁘기로 유명하였죠. 꽤 불려 다녔습니다. 성악엔 무엇보다 음성이 중요하거든요”

하는데 부인 문을 방싯이 열고 들어오신다. 그의 손에는 차 쟁반이 들려있다. 커피다.

“나 당신 욕했소”

안씨 부인을 보고 웃으니

“저 듣지 않을 땐 욕해도 좋아요”

같이 웃음으로 받으신다.

“김선생께선 안선생의 성악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안기영씨 안선생님이야 뭐 그게 생명이니까 저 같은 게 어떻게 평가를 하겠어요. 아이참 그저 음악밖엔 아무것도 몰라요. 못을 하나 박을 줄 압니까. 종일를 하나 부칠 줄 압니까. 저결 다 제가 붙쳤답니다”

하고 벽을 가리킨다.

“김선생께서 피아노도 석 잘 하신다는데 안선생이 노래를 부르실 때 반주를 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한 번 있죠 라디오 방송할 때 해봤죠”

“그 때 기분이 어떠하셨어요?”

“호호 기분이 좋지요”

“남편이 노래를 부르실 때 자꾸 반주해주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 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싶어요 그러나 제 피아노는 안선생의 반주를 충분히 해드리기에는 기술이 부족합니다. 언젠가는 한 번 하다가 되지를 않아서 그만 두고 말았어요”

하고 부인은 남편의 그 성악 정도의 수준이 어떻게 높은 것인가를 그 어감으로 나타내 보이기에 애쓰신다.

“안선생께서는 부인이 반주를 하실 때 기분이 어떠세요”

“허”

한번 웃으시고 나서

“싫지야 않지요”

“좋으실테지 뭘”

“누가 싫다고 했나 그러기”

아 이 사랑의 희롱, 이렇게 사랑에 겨운 희롱을 한번 해볼 수 없는 기자는 자신의 살림을 생각하고 은근히 부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내외분이 그 성악에 있어 서로 잘 해보겠다고 은근히 내심으로 경쟁심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현순이 저야 아마 나보다 잘해보겠다는 그럼 욕심이 있겠지요. 나는 선생이었고 전 제자였으니까 그래서 내게서 배운 성악이니까 언제든지 나만 못한 줄로 알 겝니다. 그러나 나는 현순일 가르쳐서 만든 사람이니까 나는 별로 그런 마음을 먹어본 일이 없습니다만……”

“사실이십니까? 안선생보다 잘해보시겠다는 경쟁심이 은근히 나는 것이 사실이십니까?”

오직 명랑한 웃음로 대할 뿐 침묵을 지키시더니

“잘해보겠다는 마음이야 있지요 그러나 어디 우리 안선생이야 따르겠어요 지금도 뭐 배우는데요”

하고 무슨 보표(譜表)인지를 써붙인 듯한 벽에 붙은 종이 조각을 가리키더니 “배우고 싶으면서도 겨를이 없어 못 배우죠”

“겨를은 무슨 겨를이 없어 제가 나태해서 안 배우지”

“아이 참 생각하면 저 때문에 이전에선 큰 손해이어요 안선생이 그대로 이전에 계셨다면 훌륭한 성악가들을 많이 배양해 내실 것을 나 때문에 참……”

하고 부인은 그 옛날의 시절로 돌아가 그 때의 그 일을 회상이나 하는 듯 머리를 숙이신다.

“음악상 경향 같은 문제를 서로 네가 그르다 내가 옳다 하고 다투시는 일은 없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런데 있긴 있었는데 그게 우리가 무엇으로 다투었던가?”

하고 안씨는 그것이 무엇이던가 창졸간 생각이 나지 않아 부인에게 묻는다. 그러나 부인 또한 그것이 무엇이었든가를 기억 못한다. 이에 기자는 그것이 대위치 않았던 논쟁이었던 것임을 알고 화제를 돌려

“예술상 견지에서 비위에 틀리는 점이 있으면 서로 권고도 하십니까”

“예 합니다”

“그럼 하죠”

기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이 부부 일시에 대답하는 품이 그것은 물을 필요도 없다는 대답인상 싶다.

“자제들도 장래 음성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내외분이 다 성악가시니까 자제도 상당히 그런 소질을 탄고 났었을즉 한데……”

“네 그런 무엇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 애들은 만일 장래에 음성을 지망한다면 하고 미리 주의를 시켜 기릅니다. 기침을 통 못깃게 하죠. 기침을 하면 성태가 나빠지니가요 그래서 감기같은 것이 들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 집에 심부름하는 사람들은 그래 원 이 집엔 사철 두루 가야 기침소리 한번 들어볼 수 없다고 그래요. 조선 가정에선 대개 이런 것을 주의 안 하지만 외국에서들은 여간 주의하는 것이 아니외다”

“수입은 어느 분이 많으십니까?”

“부끄럽습니다. 저야 뭐 그저 이 사람의 덕으로……”

하고 안씨는 부인을 한번 돌아보고 웃으시더니

“일정치 않아요 한 백원 넘을 때도 있고 단 오십원에 그칠 때도 있습니다”

“참 조선 예술가의 생활이란 비참한 것이어요 이것이 어찌 음악뿐이겠어요 문학 방면이나 모든 것이 안 그래요”

하고 부인은 참 이래서야 어떻게 조선서 예술 방면에 정진을 하겠느냐는 의미로 자못 그 일반의 몰이해에 마음 깊이 통탄을 하신다.

“저금은 어느 분의 명의로 하십니까. 혹은 안선생 혹은 김선생?……”

부인 웃으시며 하는 대답을 안씨 가로 채며

“저금이 뭡니까 이 집도 저 사람이……”

하는데 부인이

“아이 그런 말씀은 마셔요 공연히 또……”

하고 남편의 입을 막으신다.

“아니 뭐 이 선생께는 해도 괜찮아……”

하고 웬 까닭인지 재미없는 문구는 아니 적으리라는 의미로 기자의 붓끝은 신용하여 말하신다. 그러면서 씨는 그대로 말을 계속하려는데 부인 다시 그 말을 막는 수단으로

“저 말씀 드리겠어요 안선생은 통 돈에는 관심이 없는 양반이어요”

하고 상해로 방랑하며 지나던 이야기를 한바탕 풀어놓으시며 없는 돈을 낭비하던 이야기를 하신다. 들으니 그 속에 숨은 의미는 안씨가 그렇게 돈에 관심을 못 가져도 그것은 예술가의 타고난 소질로 그이를 탓할 것이 아니라 예술에 책임을 돌릴 것으로 오직 예술을 생명으로 삼는 것만이 고맙다는, 또는 그래야 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속해 하는 말이 아무리 살림은 어려워도 오직 음악, 그래서 그것의 힘이 둘의 마음을 서로 얽어, 얽기는 속에 뗄 수 없는 사랑이 다만 우리의 생명인 동시에 또한 가정이니 우리들에 대한 세평에는 조금도 관심치 않는다는 의미로 아니 해석할 수 없는 기자는 오직 예술을 생명과 같이 이렇게 아는 이 두 분은 이런 관계를 아니 맺고는 견딜 수가 없었으리라 생각을 하며 자리를 일어났다.

“가끔 놀러 오세요”

“또 놀러 오시죠 나가지 못합니다”

내외분이 번갈아 하시는 말씀을 뒤로 들으며 문밖에 나와 모자를 벗어 작별을 하며 돌아다보니 대문 설주에도 ‘안기영’ ‘김현순’ 요렇게 문패조차 예술의 혼이 붙었는지 바싹 다가서 그리고 정답게 붙어 있다.

김현순님은 안기영님의 두 번째 부인이었지만, 법적인 부부가 아니었다. 당

1936년 약 3년간의 상하이 도피생활을 마치고 3월 12일 서울로 돌아온 안기영과 김현순님에 대한 소식(孔雀草 1936 <다시 돌아온 安基永> ≪中央≫4월호, 朝鮮中央日報社, 256∼259쪽. 이 글에서는 안ㆍ김 두 분의 어려운 도피 생활이 그려지고 있고, 특히 김현순님의 굳건한 사랑이 돋보인다)에 이성규님은 “그러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또 내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을 가라앉힌 내 마음을 흔들리지 아니하려고 노력한다”고 굳은 결심을 보이고 있다. 한편, 백철(白鐵)은 <歌人을 救하라 : 所謂安基永「邪戀」事件의 辯>(1936 ≪中央≫6월호, 朝鮮中央日報社, 144∼152쪽)이라는 제목으로 안기영님과 김현순님의 애정 문제를 변호하고 있다. 그런데, ≪朝鮮中央日報≫ 1936년 3월 25일에는 <가수 안기영씨 실제(實弟) 변장 입만(入滿) 중 피착(被捉) : ○○사상 고취와 동지 획득의 중대한 내막 탄로>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내용을 지닌 기사를 전하고 있어 안기영님의 사상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조선 민요를 서양 화성에 맞추어 악보로 만들자는 주장이 담긴 안기영 선생

朝鮮民謠라 하면 조선사람들이 오래동안 두고 부르든, 또 부르는, 또한 불을 노래다. 「볼가船人의 노레에서 로서아 내암새가 나고 「올랭싸인」에서 蘇格蘭(스코틀랜드_옮긴이) 내암새가 나고 「孟姜女」에서 中國 내암새가 나는 것처럼 조선민요에서는 唯一한 조선내암새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선 내암새 나는 노래들을 조선사람들이, 그중에서도 더구나 점잔코 有識하다는이들이 눈쌀을 찡그리고 천대하게 되엇으니 이것이 얼마나 죄악된 일이냐? 그 理由는 勿論 노래라 하면 歌詞에 關係가 많이 됨으로 在來의 조선민요는 가사가 亂雜하고 不道德한 것이 많아서 좋지 못하다고 하리라. 그려면 그 音樂, 卽 ‘멜로디’의 音調와 拍子가 美妙하다고 稱頌하는지 몰은다. 그 노래의 主人되는 조선사람들 보다도 오히려 外國人인 그들이 “眞珠를 도야지에게 주어서 짓밟히게 됨”을 매우 哀惜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그러하였지마는 얼마나 우리의 민요를 無視하야 왓는가? 그 貴하고 高尙한 노래를 다만 淫亂하고 放蕩한 時間의 遊興物로 만들어 버렷으니 우리의 罪가 얼마나 甚한가?

아모리 거룩한 찬송가라도 그러케 不學無識하고 그우에 술까지 醉해서 목소리커냥 몸도 지탱치 못하는 그 무리들에게 단 一年만 제멋대로 불으게 내버려 두어라. 生後에 그림 工夫란 한 시간에도 못한 못한 狂人이 羊을 그린다고 개도 그리고, 도야지도 그리고, 하다못해 別別 것을 다 그려놓은 것처럼 그 醉狂들은 ‘예수사랑하심’은 曲調가 ‘아리랑’이 되게 할는지 ‘長恨歌’가 되게 할는지 몰은다. 그러니 事實에 잇어서 지금의 朝鮮謠란 原曲대로 傳 해진 것은 하나도 없으리라고 斷言할수 잇는 것이다. 물론 退化되엇으면 되엇지 進步는 못되엇으리라. 그러면 이러한 이유로 우리들은 다만 그노래를 귀에서 입에서 멀니하게만 할 것인가.

아모리 퇴화되고 惡化되엇을지라도 조선의 민요는 우리의 노래니 우리가 救援 하여야된다. 짓밟혀서 더럽게 되고 찌그러지고 떠러지엇을지라도 恨歎만할 것이 아니라 다시 집어서 그것으로 써 될수 있는 最善을 다하여야 된다.

거룩한 노래라고 일컷는 찬송가 속에는 ‘러부쏭’이 얼마나 많은지 알수 없다. ‘하날가는 밝은 길이 내앞에 잇으니’는 참으로 敬虔한 마음으로 聖歌다웁게 불으나, 이것의 原來는 소격란의 민요로 ‘애늬, 로리’라는 것이니 이 이름가진 活動寫眞을 본이는 한 靑年이 戀愛病에 걸려서 ‘끼타’를 하며 美人 ‘애늬, 로리’를 노래함을 보앗으리라. ‘그 女子의 이마는 눈송이 같고 목은 게대우같으며 두눈은 풀은 湖水 같다’ 此等이 그 가사의 內容이다. 萬一 조선교회에서 이러한 가사가진 민요 곡조를 성가로 가사만 고쳐 사용하자 하면 逐出을 當햇을지도 몰은다. 그러나 洋人들은 음악에 對한 愛着心을 끈을수 없어 多少曲折을 不拘하고 그 멜로듸의 성가를 지어 불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도 우리의 寶貝를 다시 찾으려하는 熱이 일게 되엇다. 다른 것보다도 먼저 우리의 高貴한 민요는 내버려 둘 수가 없다는 決心으로 조선에서 유일한 音樂學校인 梨花專門 音樂科에서는 우에 말한 理論에 서서 다소의 非難을 무릅쓰고 남이 始作하거든 도아줄 處地가 아니라, 내가 훌륭한 보패로 만들 才能은 不足하나 ‘짓밟힌 진주’에 묻은 흙이라도 싳겟다는 생각으로 그 진주를 집어 손에 든 것이다. 뜻이 잇고 才幹이 많으니가 잇서 다시금 찬란한 진주로 만드러 놓겟다하면 우리는 얼마나 감격한 눈물을 흘리며 그 진주를 전할 것이냐.

女學生들이 舞臺에 올라가 ‘양산도’와 ‘방아타령’을 하게되니(물론 가사를 改良하야서) 처음에 점잔은 老人들께서는 ‘여학생이 妓生들 처럼 「소리」를 하다니, 學校에 보낼수 없군’ 하시는 말슴, 또 險口들은 그저 욕만 잘하면 잘난줄 아는지 ‘梨花券番’(‘이화기생조합’이라는 뜻_옮긴이)이라는 새 이름까지 듣게 되엇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데는 귀먹어리가 되엇다. 그래도 많은 人士들이 激勵하고 贊成하는 말을 들을 때는 퍽 감사하엿다. 漸次로 조선 사회는 이레이 誠意로 同情하게됨을 느끼게 된다.

그러하나 지난 겨울 放學동안에는 이화전문학생 14인으로 合唱隊를 조직하야 지방에까지 조선민요의 음악적 가치가 귀중함을 알리우기 위하야 순회 음악연주회를 열게 되엇다. 학교와 학생의 명예를 위하는 마음으로 다수의 선생들이 교수회에서 그 모험적 음악여행에 반대하엿다. 그러나 마츰내 실현케 되어서 意外의 대성공을 얻게 되엇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지방에서도 그처럼 우리 노래에 경건한 중에도 열렬한 태도로 대하게 됨을 볼때 감격한 눈물을 흘리며 ‘이제는 조선에도 생명이 온다’고 기뻐 뛰엇다.

끝으로 몇가지를 들어 일부 인사들의 항의에 대한 나의 어리석은 答辯을 쓰고 그만 두려한다.

一. 이화의 ‘양산도’나 ‘방아타령’은 재래의 것과 다르니 웬일이냐?함에 대하야 나는 다시 反問하는 것을 ‘어떤 가수를 표준하고 하는 말이냐?’하리라. 이모의 소리와 다르단 말인지, 김모의 것과 다르단 말인지, 가수마다 같은 ‘양산도’나 ‘방아타령’을 다 다르게 하는데다가 또한, 한가수라도 작년의 래코-드와 금년의 래코-드 소리가 또 다르니 무엇을 표준하고 재래의 것과 다르다고 틀렷다는 말이냐?

거기에는 반드시 한 음악가가 상식적 樂理로 판단하야서, 첫째로 그 노래의 독특한 정조를 잃지 안토록 하고, 또한 그 음계와 박자를 주의하야서 악보에 올리는 방도외에 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민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게 된 것임애 음악적으로 불완전한 점이 다소 잇어서 악보에 올려 영구히 보존하려 할때는 그리하는수 밖에는 없다. 그보다 더 완전한 것이 악보화 되기 전에는 몇백년후에는 그것이 전하여지게 된다. 그리하야 어떤 가수가 부르던지 동일하게 된다. 민요는 몇백 몇천사람이라도 꼭 같이 함께 부르게 됨이야말로 의미깊은, 것이 아닌가?

二. 조선민요는 조선악기와 장고나 가야금같은 것에 마추어할 것이지, 양악기인 피아노 반주는 부당하다 함에 대하야 나는 다시 ‘정고보다는 가야금에 마추어함이 낫지안으냐?’물으면 그는 그러타 하리라. ‘그러면 한거름 더나아가 가야금보다도 피아노가 낫다’말할수잇다. 웨? 장고는 음악에서 중요한 ‘음’과 ‘박자’중 박자밖에 음은 낼수 없는 것이다. 즉 지금도 야만인 중에서 많이 볼수 잇는 원시적 악기이다. 거기 비하면 가야금은 음과 ‘박자’를 다 낼수 잇음에 변화가 더 많아 좋다.

그러나 가야금은 일시에 일음 밖에 내지 못하되, 피아노는 일시에 여러 음을 함께 낼수 잇다. 즉 가야금은 단음의 멜로디 밖게 못 내되 피아노는 멜로디와 그 和聲까지 낼수 잇는 것이다(물론 박자는 말할 것도 없고). 피아노야말로 현금 세계에 잇는 아모 악기보다도 제일 조화많이 부릴수 잇는 악기다.

조선사람은 재래의 조선 것만을 사용한다는 고루한 생각으로 아모리 침침하고 갑갑해도 양인의 전등을 안켜고, 아모리 급해도 기차를 안타야 옳다면 몰으되, 남의 만든 것이라도 좋은 것은 다 배와 알아서 낙오자가 되지 안켓다 생각한다면 피아노가 양악이니까 조선민요의 반주에 합당치 안타 하면 그야말로 당치안은 생각이다.

三. 조선민요는 동양 오음계를 토대로한 멜로디인데 합창과 반주에 서양 칠음계의 화성을 붙임은 불가하다 함에 대하야 또 다시 반문하노니, 그 서양 칠음계는 어떠한 유래를 가진 것이냐? 오음계라 하면 ‘도레미솔라’를 말함이요, 칠음계라 하면 그 오음에 ‘파’와 ‘씨’의 이음을 가하게 된 것이다. 이로 보면 소위 서양 칠음계는 서양에서 창작된 것이 아니라, 동양 것이 서양것으로 다시 변화 발달된 것 뿐이다. 동양에도 또한 칠음계가 잇다. 즉 ‘궁상각치우’의 오음이던 것을 후에 ‘변궁’과 ‘변캄를 가하야 칠음이 되엇다.

그러나 복잡한 것을 싫어 하는 마음에 오음계를 그냥 대부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오세된 아이에게 칠세된 兒의 옷을 입히면 조곰 크다고 하엿으나, 아우가 변화 되도록은 흉하지 안은 것이다. 아우의 옷은 만든 것이 없음애 알몸둥이만 두는 것보다는 두살 더 먹은 형의 옷이라도 하나 갖다 입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원문_국회도서관(https://u-lib.nanet.go.kr/)에서 얻음

즉 칠음계화성을 오음계 멜로디에 붙이는 것은 결코 오음계멜로디의 정조를 변케 만들지는 안는다는 말이다. 물론 남녀가 달은 兄妹間이라면 좀 異議가 생길 것이나, 우에 말함 같이 두 음계는 꼭 같은 性들이고, 다만 칠음계가 오음계보다 二歲가 더할뿐이다. 물론 화성은 변화를 위하야 생긴 것이요, 피아노는 반주악기로 사용하는 것은 그 화성을 연출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 조선민요의 반주를 관현악으로 하게 되면 제일 만족한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全峯寬

● 1971년 부산 출생

●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등

출처 : 추영재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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