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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31일 Facebook 이야기
구름위집
2012. 8. 3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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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결인 8월 31일
장창덕(張昌德) 목사(1910. 8. 31. - 2001. 3. 27.)
평남 강동에서 명문 가문에 장로교회 존경받는 장운경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927년 3월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큰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올라 명문대 동경척식대 예과에 입학하다. 1931년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동지사대 여자전문부를 졸업한 유학생 김윤숙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다. 부인은 해방 후부터 숙명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1932년 3월 동경척식대 상학부를 졸업하다. 수재만이 갈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일제가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려는 정책에서 세워진 대학임을 알고난 후 부끄러웠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중국어 교사로 있다가 1937년 중국 문화 연구차 븍경으로 유학의 길에 오르다. 1938년 문학연구를 틈틈이 하면서 법률공부를 한지 1년만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만주국무원사무원으로 민사법규룰 편찬하는 작업을 하다.
1939년 10월에는 중국 신경중앙장로교회 장로로 장립하여 이민교회 기둥역할을 성실히 하다. 1944년 중국 사법부 관료로 단동지방에 파견 받았으나 일제 패망이 가까움을 알고 사직하고 귀국하다. 1946년 12월 미 군정청 과도입법위원회 입법위원 겸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 발탁되다. 1947∼1948년까지 서울대학문리대 경제정책과목에 출강했던 경력도 있다. 1949년 4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므로 소명적인 삶의 출발과 그의 생애에 전환점을 가져오다. 1951년 동 대학의 제1기로 졸업했으나 자유주의 신학과 교리에 적응할 수 없어 복음주의 교단 성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독립문교회 담임목사(재임 중 교회 신축 헌당)로 부임하다. 1952년 서울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성결교회 복음적 신학을 체계화하는 데 이바지 하다.
1957년 인기 있는 원서 강의를 하면서, 웨슬리신학의 전공을 위하여 도미하여 에즈베리 신학과에 편입하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만학도로서 힘겨운 유학생활을 사명감으로 잘 마쳐, 1958년에는 B.D. 학위를 받고, 그 이듬해 1959년에는 Th.M. 학위를 획득하고 귀국하다. 1959년 귀국하면서 서울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최초의 학감으로 임명되다. 1962년 5월 서울신대 학감을 사임하고 서해 외딴 섬교회를 섬기다가 상경하여 불광동교회(성광교회)를 개척하다. 1967년 신학교에서 받은 퇴직금과 사재를 털어 아담한 교회당을 건축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다. 나성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로 2년간 시무하고, 나성한인 연합감리교회 주일학교 교육목사로 봉사하다. 1991년 8월 4일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 원로목사로 당회와 교우들 만장일치로 추대하여 지내다. 3001년 3월 27일 오후 4시 15분 91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그는 인간미가 풍부하고, 어학의 천재로 영어, 중국어, 일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웨슬리신학자였다.
그의 저서로, 재림의 복음(1953), 휴거론(1955), 성결(1960), 주는 마음(1969 설교집), 등이 있으며 자녀는 장대원 장로(자부 한순주), 차남 장대형(자부 홍수희), 장녀 장대옥(사위 정석준), 차녀 장송자(사위 양승억), 삼녀 장경옥(사위 이석규) 등과 믿음의 아들 이진구 목사가 있다.
새누리당 당대표에 당선